무디의 무책임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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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스토커?! by 무디

비밀은 아닌 이야기... (12)

 얼마 전 한 번역작가분과 담소를 나눈 적이 있다. 투니버스 초창기부터 영상번역을 해오신 분으로 지금은 모 학원의 일어번역강좌에 강사로도 나가고 있는 분이다. 필자가 담당한 여러 녹음의 대부분이 일본 애니메이션인 까닭에 최근에 번역을 공부하는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슬며시 들어 질문을 던져봤다. 혹시 앞날이 창창한(?) 새로운 인재(!!)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언뜻 보면 한숨과도 비슷한 묘한 웃음을 짓던 작가 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별로 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주된 원인은 일어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국어’실력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 분 가라사대… “수업을 해보면 솔직히 저보다도 일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런데 정작 번역을 시켜보면…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것이 많더라고요. 국어 실력이 떨어지는 거죠…”

 그 학생들이 일본에서 너무 오래 살고 온 탓에 우리말을 잊어버린…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가장 기초적인 국어 실력이 딸린다는 것인가? 그것은 가장 기본이며 어쩌면 가장 어려운 번역의 관문… ‘지역화’가 약한 것이라 생각된다. 지역화… 번역으로 보면 수입하는 국가의 문화와 정서를 고려한 번역을 지역화라 할 수 있겠다.

 꽤 오래 전 일본에서도 몇 년을 생활했고, 나름대로 영상번역 아르바이트를 했었다는 신인과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신인과 2번인가 일을 한 뒤… 그야말로 그 사람에게서 도망치듯 했던 기억이 새삼 들었다. 그 신인의 번역대본을 받았을 때의 느낌… 그것은… 그 대본은 일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란 거였다. 그 신인이 일본 대사를 모를 리는 없다. 거기서 살다 온 사람이니 모를 리가 있겠나? 하지만 그 번역 대본은 의미가 불분명한 것이 너무도 많이 보였다. 결국 그 신인은 자신이 보면 알지만 그 대본으로 된 우리말 대사를 듣는 일반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번역을 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숙달된 번역작가도 종종 저지르는 실수이다. 자신은 외국어를 잘하는 탓에 완전히 ‘지역화’된 대사가 아닌 중간형(?)의 번역대사가 나와도 자기는 내용을 알기에 그냥 넘어가다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밝혔듯 가장 기초적이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지역화)을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앞날이 창창한 번역가가 될 자질이 있는 셈이고, 당연히 필자 같은 인간들은 이런 사람들을 우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상 번역’인 까닭에 재치 있는 번역을 할 수 있는 ‘끼’도 있다면 그야말로 일하고 싶은 번역작가 ‘0순위’라고 하겠다.
 
 ‘지역화’를 기본으로 한 ‘끼’의 발휘… 이런 예를 들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필자가 녹음한 작품 중 ‘핑키와 브레인’이란 작품이 있다. 미국작품으로 풍자와 해학이 아주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 중 이런 장면이 있었다. 세계 정복을 꿈꾸는 머리 큰 생쥐 브레인이 영화사에 찾아가 자신이 기획한 시트콤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브레인이 기획한 시트콤은 다름 아닌 당시 미국에서 웬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을 실제 시트콤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새로 만들어왔다는 것이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작품인 것에 웃음의 포인트가 있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번역할 때 번역작가 자신은 그 실제 시트콤을 안다면서 그 내용 그대로 번역할 경우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은 웃음의 포인트를 잃어버리게 된다.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 오히려 재미를 반감하며 원작이 노린 의도를 없애는 결과를 초래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장면을 필자와 함께 작업한 번역작가 분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국내의 시트콤으로 대치하여 그야말로 문화적 정서에 맞으면서 원작이 의도한 웃음을 살린 재치 있는 번역을 해내어 필자가 그 대본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었다. 벌써 이정도의 번역을 하시는 작가분 들은 한마디로 이미 경지에 오른 분들이라 하겠다.

 헌데 올 봄에 이 경지마저 넘어서는 번역을 선보인 분이 있었으니…!!! ‘시티헌터 TV스페셜’을 녹음할 때였다. 애초에 필자는 이전의 시티헌터 시리즈를 녹음한 적이 없었고 단지 ‘팬’일 뿐이었다. 결국 ‘일’로서 시티헌터를 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번역작가 또한 시티헌터를 투니버스를 통해 재미있게 시청했을 뿐 아무 관계가 없던 분이 번역을 하게 됐다. 이런 탓에 필자 또한 이전에 방송된 부분에 대해 사우리 역을 맡았던 성우 이명선 씨에게 자문(배역 및 분위기 등에 대해)을 받았고 이를 작가 분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런 뒤 첫 번역대본을 받고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사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시티헌터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시청을 하면서 주인공 성우인 강수진 씨의 특징을 눈여겨봐두었는지 평소 강수진 씨가 구사하는 애드립마저 챙겨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사실은 첫 녹음을 위해 녹음실에 도착한 강수진 씨가 명쾌하게 증명해주었다. 녹음을 위해 도착하자마자 필자를 찾은 강수진 씨가 대뜸 이러는 것이 아닌가? “정말 대단한 대본이군요. 내가 여기선 이렇게 애드립을 할 것이라는 것이 다 계산되어 있다니! 게다가 말투마저 제 입맛에 따악(!) 맞는군요!” 최상의 칭찬이 아닐 수 없다! 기본적인 ‘지역화’에 ‘재치’있는 번역은 물론 주인공을 맡은 연기자(성우)의 특성까지 고려한 번역대본이라는 것이니 그야말로 이 바닥(?)에서 볼 수 있는 대본 중 최고품질의 대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일주일 후 두 번째 녹음을 위해 투니버스에 온 강수진 씨는 계속 대본에 대해 칭찬을 하며 필자에게 번역작가를 소개해달라는 말까지 한다. 누군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대본이 맘에 들었으면 이런 농담(?)까지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물론 대본이 마음에 들기에 그런 것이긴 한데 거기에 한가지 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그로부터 1주일 뒤 시티헌터 TV스페셜 녹음이 끝난 뒤에 알게 됐다. 녹음이 끝나고 다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강수진 씨가 다시 번역작가 얘기를 꺼낸 것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정말 나를 연구(!)한듯한 대사였다. 그리고 정말 놀란 것은 2주차 녹음 때였어. 악당으로 나온 무상이 이런 대사를 하거든? ‘여기가 사당이야. 더럽고 추잡한 시티헌터의 앞마당이지…’ 내가 지금 사는 곳이 사당동이잖아! 그 대사 보는 순간 바로 쓰러졌다고! 내가 사는 곳까지 알다니 혹시 그 작가 스토커 아냐?” 이런 이런… 그래서 2주차 녹음 때 작가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셨구만… ^^;;; 그거야 뭐 어쩌다 보니 그 지명이 나온 것이지만 워낙 자신을 연구한 듯한 대사가 나오자 농담 삼아(?) 그렇게 의심을 한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연기자(성우)마저 감탄할 만한 대본이야말로 정말 정상급의 대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대본이 더빙의 가장 초석이 되는 것이니 대본이 좋을수록 튼튼한 녹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매번 이런 대본이 나와주기만 한다면!!! 정말 필자의 가장 큰 바람이 아닐 수 없다!

덧글

  • 2008/01/25 15:41 # 삭제 답글

    좋은 번역대본이란? 질문에 대한 생생한 답변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두고두고 읽고 싶어서 담아가고자 합니다.
  • 무디 2008/01/27 23:56 # 답글

    꽤 오래된 글인데... ^^;;;
  • 라됴매니아 2015/11/16 22:42 # 삭제 답글

    좋은 글이네요 두고두고 읽고 싶어서 즐겨찾기 꽉! 박고 갑니다~~~
  • 레지스터 2022/08/28 22:26 # 삭제 답글

    이번 호의 주인공인 번역작가님이 현재까지도 명번역으로 칭송받는 윤강비 작가님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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