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의 무책임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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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Part.1 by 무디

이 컬럼은 원래 AZN4에 올리려 했다가 뒤늦게 뉴타입에 실리게 된 글이다... ^^

비밀은 아닌 이야기... (16)

더빙의 경우는 여타의 방송물에 비해.. 작업 시 ‘긴박함’이 덜한 것이 사실이다. 왜? 만화영화를 생방송으로 더빙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더빙은 사전에 완성이 되어야 방송할 수 있는 품목(?)이다. 헌데 매우 드물게도 수입 만화영화(외화) 더빙의 경우에도 솜털이 곤두서는 긴박감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나오곤 한다. 생방송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이 가끔이나마 일어나는 것일까? 앞으로 이러한 에피소드에 대해 띄엄띄엄(^^) 연재해 보겠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Part.1

 투니버스에서 방송된 ‘사랑은 정말’이란 작품을 기억하시는지? 인기 시트콤을 능가하는 스토리와 귀엽고 독특한 그림으로 방송 당시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다. 필자에겐 가장 재미있게 녹음한 작품으로 기억될 정도로 애착이 가는 만화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정말의 시작은 그야말로 가시밭 길이었으니...

 첫 방송을 준비할 당시 얘기다. ‘사랑은 정말’의 아시아 지역 판권은 대만 쪽에 있다고 했다. 해서 마스터 테이프도 그 쪽에서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착 예정일.. 테이프 대신 구매 담당자의 떨떠름한 얼굴이 필자를 찾아왔다. 담당자 왈 ‘태풍으로 인해 테이프를 운반할 선박이 침몰했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다행히 그 때만해도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기가 막힌 표정을 애써 지우고 ‘태풍 지나면 오겠네..’하며 나름대로 표정관리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테이프가 들어왔다. 냉큼 테이프 하나를 꺼내 재생 데크에 집어넣고 힘차게 PLAY버튼을 누른 뒤 5분 경과… 필자는 뒤로 발랑 넘어졌다.

 왜? 일단 화질이 속말로 개판인 것이다. 에누리 없이 70년 대 작품보다도 못한 색상과 어두운 명암만이 필자의 눈에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 심한 상처는 귀에 있었다. 도착한 테이프는 대만 더빙판으로 모든 캐릭터들이 한 때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으로 친숙했던 바로 그 언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뭐야 이건? 그럼 중국어 번역작가를 찾아야 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들이 보내온 대본은 일본어 대본이었다(놀리나?). 필자는 중국어 대본을 보내달라고 하든가 일본판 테이프를 보내달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고, 당연히 일본판 테이프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어가 좋아서?...는 아니고(^^) 위에 밝혔듯 엉망인 화질이 이유였다!

 테이프가 다시 오기까지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갔다. 그리고 처음의 여유를 거의 다 까먹고 첫 방송이 임박해서 테이프가 도착했다. 일본판이었다! 한 숨 돌린 필자는 다시 온 테이프를 확인하곤 또 다시 뒤로 넘어갔다. 말만 일본어로 바뀌었지 화질은 그대로 아닌가(또.. 놀리나?). 일본작품이 대만에서 온다고 할 때부터 뭔가 냄새가 났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즉시 일본 본사에 테이프를 요청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결과부터 미리 말하면 일본 본사는 중반 이후의 테이프들만 시간에 맞게 그리고 정상적인 화질로 보내줬다. 그럼 초반부는? 위기의 순간 잔 머리의 귀재인 필자는 동경지사를 통해 당시 일본에 시판 중인 사랑은 정말의 LD들을 몽땅 입수했다! 그리고 20화 정도까지의 방송 분은 화질 불량 테이프에 더빙을 하고 비디오는 LD화면을 덮어 처리한 것이다. LD의 경우는 방송 마스터 테이프만큼은 못하지만 거의 근접한 화질을 자랑하기에 그러한 잔 머리가 실현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LD에는 오프닝과 엔딩 타이틀이 일본 자막이 들어간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초반의 방송은 본편은 화질이 괜찮았지만... 오프닝과 엔딩은 대만 쪽에서 보내온 70년 대 화질의 화면이 방송을 탈 수 밖에 없었다.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중반 이후의 테이프들이 도착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오프닝 엔딩의 넌크레딧(일본어 자막이 없는)도 동봉했는데... 이건 테이프가 아닌 필름이었다.

 필름의 경우는 방송용 테이프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방송할 수 있다. 이 작업의 명칭은 ‘텔레시네’! 회사에선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즉시 작업이 가능한 프로덕션을 수소문하고 찾아갔다. 그리고 필름을 걸고 재생하는 순간 필자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필름의 화질이 대만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얘들도 놀리나?). 깊은 한숨과 함께 괜히 비용 낭비하지 말고 곱게 철수하려 마음먹은 순간! 엔지니어 분의 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화질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치 거짓말처럼 깔끔한 화질이 재생되기 시작했고 베타 테이프에 그 상태 그대로 담겨졌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의문은 곧 풀렸다. 이 텔레시네 작업도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이고 대만의 경우는 텔레시네 못하기로 소문난 나라라는 사실을(물론 우리나라는 수준급)! 결국 대만에서 온 나쁜(?) 테이프들은 텔레시네 실력에 의한 산물이란 것이 밝혀졌다. 덕분에(?) 상식 하나 배우고 방송도 화질 면에서 모두 정상 가도에 올라섰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일본에서 보내온 테이프들 중에서 딱 2편이 대만판과 차이가 없는 나쁜 화질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것은 텔레시네 잘 하고 있다가 잠시 졸았거나 그 부분만 신참이 담당해서가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해 본다(아니면 필자를 놀리려고?). 헌데 다시 일본에서 테이프를 받기엔 방송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하지만 필자는 예상외로(?) 여유 만만! 그 화수에 해당하는 LD가 이미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녹음을 하고 믹싱을 하고 편집의 순간이 다가왔다. 시작부분만 맞추면 화면은 마치 새로 칠하듯 바뀌게 된다.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뭔가? 테이프에선 대사가 끝났는데 LD화면의 캐릭터는 계속 입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두 소스의 플레이 속도가 다른 것이다! 아아.. 이런 일이.. 앞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잘만 맞았었는데… 다시 잔 머리 잘 굴려보고 이유를 알아냈다. 일본 본사가 보낸 불량 테이프의 경우는 전체적으로 정상보다 피치가 빠른 것이었다. 화면도 조금 빠르고 당연히 오디오도 정상보다 빠르게 텔레시네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말 더빙은 당연하게도 피치가 빠른 이 일본 오디오에 딱 맞게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정상 속도인 LD화면은 필자가 녹음한 우리말 대사가 끝나도 입을 움직인 것이다. 방송은 코앞이었다. 그 시점에서의 선택은 방송 펑크내고 테이프 다시 받은 후 재녹음 아니면 그냥 내보내기.. 라는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었다. 방송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품질이 나빠도 그냥 내보낼 것인가.. 헌데 문제의 화수 들은 하필 스토리가 이어지는 내용들이었다. 빠지면 정말 이야기 전개에 구멍이 나는 상황! 결국... 화질이 나쁜 것을 두 눈 꼭 감고 모른 체하며... 방송강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이 나가고 여기저기서 화질에 대한 항의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50편 전체가 나쁜 것보다야 엄청난 선방이 아닌가?(^^) 지금도 사랑은 정말을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과 함께 뒷목덜미 너머로 찐한 땀방울 하나가 만화처럼 흘러내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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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사시코 2014/10/19 13:26 # 삭제 답글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15년이 지난 요즘 이 애니를 다시 보고 싶어서 검색하다가 들렀습니다. 기회가 되면 일본에서 dvd든 블루레이든 LD든 구해서 보고 싶네요.
  • 무디 2014/10/19 14:48 #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어 반갑습니다. ^^
  • 먹통XKim 2014/11/25 00:18 # 답글

    어쩐지 ㅡ ㅡ..그런 일이 있었군요
  • 무디 2014/12/01 17:03 #

    아아주 오래~전 이야기죠. ^^
  • belliny 2022/09/05 20:51 # 삭제 답글

    엄청난 시간이 흘렀지만, 요즘도 보고 싶은 애니인데...
    이런 엄청난 뒷 얘기가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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