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의 무책임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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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어려운 것은… by 무디

비밀은 아닌 이야기... (26)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말을 만화영화 TV시리즈에 쓸 때가 있다. 작화의 경우는 오히려 뒤로 갈수록 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성우 연기의 경우는 확실히 화가 진행될수록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사실이다. 연기하는 시간이 늘어나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강해지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스토리가 점점 확실히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TV시리즈가 아닌 ‘극장판’이나 4편 이하의 OVA같은 경우는 자리를 잡을 시간이 없다. 대신! 모든 스토리가 한 번에 들어오는 탓에 연기하기도 연출하기도 훨씬 수월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다 알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연기의 측면에서는 ‘설정’의 쉽고 어려움이 그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TV시리즈의 경우는 첫 녹음에 들어갈 때 각 캐릭터들이 각자의 성격을 일부만 보여준 초반 스토리에 기반해 작업을 하곤 한다. 방대한 작품일수록 처음의 서너 편에서는 그야말로 작품의 주제조차 파악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이러다 보니 아주 디테일한 성격설정이 힘들게 되고, 작품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리를 잡아가는 경우가 많게 된다.

 반대로 극장판이나 짧은 OVA의 경우는 제 아무리 복잡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가 나온다 해도 한 번에 볼 수 있는 스토리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게 되므로 캐릭터에 대한 전체를 파악할 수 있으니 성격 설정이 수월하다. 결국 연기의 측면이든 연출의 측면이든 녹음의 난이도를 좌우하는 상당 부분은 캐릭터의 성격 설정이 수월하냐 그렇지 않냐에 달렸다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성격설정은 단순히 어떤 캐릭터의 설정과 성격이 이렇다…고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 실제 목소리 연기로 표출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고 보시면 되겠다.

 가끔 필자는 어떠한 녹음이 어려운가 하는 질문을 받는데 이 때 필자는 주저 없이 그리고 현재까지도 내용에 변함없이 답한다. ‘게임 녹음이 제일 힘듭니다!’라고… 이유는?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성격설정’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 녹음할 때는 게임개발사에서 캐릭터의 모습과 각각의 성격을 기술한 자료 등을 주고 설명도 해주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역시 스토리를 통해 가슴으로 느껴야 만이 캐릭터에 동화될 수 있고 표현이 수월해진다. 연출도 마찬가지! 뭔가 느끼는 것이 있어야 어떻게 해달라고 연출을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여기서의 스토리는 줄거리 수준이 아닌 완전한 대본의 수준을 말한다. 줄거리만 읽고 가슴으로 느끼긴 힘들지 않은가? 코믹한 작품이면 즐거움을 비극이면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가슴으로 느낀 것이지 ‘아… 이런 내용인가…’하고 생각하는 수준은 느꼈다고 하기 힘들다.

 템페스트 녹음을 할 때였다. 개발사 담당자들과 필자 그리고 캐스팅된 여러 성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담당자들로부터 게임의 줄거리 및 캐릭터 성격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전미팅 자리였는데 처음 듣는 이들에겐 그 줄거리가 너무나 복잡한 구성이었다. 해서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아… 모르긴 해도 준비를 많이 하는 작품이구나…’하는 생각만 남았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실제 녹음을 해야 하는 대본을 보니 몇몇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사가 아닌 ‘기합’이나 ‘비명’, 좀 길면 ‘주문’이 거의 다였다. 대사가 제법 있는 소수 캐릭터들의 대본 역시 이른바 이벤트 위주로 스토리가 뚝뚝 끊겨있는 탓에 읽다 보면 ‘왜 갑자기 이 내용이 나오지?’하는 의문만 증폭시켜주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우는 목소리로 연기를 해야 했고 필자는 밖에서 연출을 해야 했다. 그나마 대사가 있는 캐릭터들은 다소 수월했지만 그렇지 않은 캐릭터들은 초반에 뜬구름잡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가 간신히 감(느낌)을 잡고 진행할 수 있었다. 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생각해보니 게임의 대사 녹음은 만화영화로 보면 ‘선 녹음’과 같은 것이었다(완성된 그림은 없고, 캐릭터의 모습과 성격, 대본만이 있는 상황이니까!).

 만화영화도 그림이 완성된 뒤 녹음하는 ‘후시 녹음’보다는 그림 보다 먼저 녹음하는 ‘선 녹음’이 더 어렵다. 후시 녹음은 ‘립싱크’라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일단 완성된 그림이 존재하므로 연기나 연출이 수월하다. 그림의 표정이나 행동을 목소리 연기로 맞춰주면 되니까 말이다. 헌데 게임 녹음은 애니메이션의 선 녹음 형태이면서 거기에 더해 대본까지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니 게임 녹음이 힘들 수밖에. 그렇다면 게임은 모두 대본이 완전하지 않은가? 그렇지도 않다. 이후 녹음한 창세기전3의 경우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대본이 갖춰진 게임이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녹음한 마그나 카르타의 경우는 거의 완전한 대본을 갖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창세기전3도 그랬지만 마그나 카르타의 경우는 대본의 두께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그 대본에 있는 대사를 쭉 녹음해보니 어느덧 4시간이 넘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4시간은 이른바 런닝타임이다. 그리고 이 런닝타임 안에는 오로지 대사만이 존재한다. 대사만 4시간이라면 웬만한 영화(음악 등이 들어간!)로 본다면 런닝타임이 거의 두 배로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방대한 양 때문에 성우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녹음하기는 불가능했고 또한 질적인 면을 고려해 남녀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은 모두 개별로 녹음을 진행했다. 남녀 주인공은 서로 주고 받는 대사가 가장 많기 때문에 서로간의 호흡을 위해 동시에 녹음을 진행했다. 녹음이 끝난 뒤 개별로 녹음한 대사들을 대본 순서에 맞게 배치한 뒤 모니터를 해봤다. 그랬더니 몇몇 부분이 호흡이 맞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남녀 주인공은 이상 없었지만 모두 개별로 녹음한 나머지 캐릭터들간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는 부분이 나온 것이다. 따로 녹음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프로들이 작업하기 때문에 그런 실수는 웬만해선 없다. 그리고 그 ‘웬만해선’이 마그나 카르타의 경우엔 바로 살인적인 ‘대사량’이다. 워낙 대사가 많다 보니 연출도 놓치고 노련한 성우들도 실수가 나온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 때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던 탓에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들을 재녹음 해 수정할 수 있었다. 창세기전3(필자는 Part 1을 녹음 연출했음)의 경우는 급박한 스케줄로 인해 수정녹음을 진행하지 못했었다. 출시 이후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모니터를 들었는데 그 것을 마그나 카르타에 와서야 보완한 셈이다. 마그나 카르타의 수정녹음을 끝낸 뒤 게임개발사 직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극장판 3개를 동시에 녹음하는 게 더 속 편하겠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필자는 게임녹음이 제일 힘들다. ^^;;;

덧글

  • 지나가던사람 2005/12/11 19:17 # 삭제 답글

    그렇지만 창세기전3 파트1은 성우분과 캐릭터의 싱크로가 무지무지 좋아서 몰입하서 게임할 수 있었어요. 연기도 좋고..아으, 버몬트 대공과 구자형님의 그 광기..제대로 입니다.
  • 지나가던행인 2010/10/20 21:02 # 삭제 답글

    창세기전3 파트2도 김일 성우님의 아슈레이 연기가 대박이었다는... 파트2와서 살라딘은 너무 재미없어졌...
  • 무디 2010/10/22 21:37 #

    파트2는 제가 연출하지 않아서 뭐라 할말이 없다는... ^^
  • 먹통XKim 2011/12/13 08:14 # 답글

    템페스트....

    1999년 12월 발매하자마자 구입했다가 그 가공할 버그 땜에 스트레스 팍팍 받았던 추억이^ ^;; 있죠

    으음..무디님 말씀처럼 게임이 어려운가 봅니다...그리고 내 의견일 뿐이지만 템페스트 더빙을 듣으면서
    대체 성우가 누구야?(..........)하다가 나중에서야 이명선.이지영.박경혜.양정화 씨같은 분들 이름 보고 충격을 받았죠. 성우분들이 연기가 못하기보단 웬지 낯설었다고 할까요?

    (이상한 건 템페스트만 이렇고 나중에 양정화님이 맡은 포토제닉이나 다른 게임들 연기를 듣으면 그다지 이상한 걸 못느끼겠더군요...)
  • 무디 2011/12/17 20:36 #

    99년... 참 아득한 시절입니다. ^^
    다시금 녹음하던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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