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아닌 이야기...(109)
Ⅰ.
11월 16일부터 투니버스에서 방송 중인 ‘캐릭캐릭체인지 두근두근’ 주제가 제작을 맡아 작업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올해는 창작 주제가 작업이 드물었던 탓에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었고, 살짝 두근거리는 떨림도 있었어요. 작곡은 투니버스의 마상원이라 불리는 이창희 음악감독이, 작사는 제가 했습니다. 작업을 모두 마치고 이창희 음악감독과 통화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번 ‘캐릭캐릭체인지 두근두근’의 주제가를 만들면서 예전 ‘사랑은 정말!?’ 주제가를 만들 때 기분이 들었다고요. 두 작품이 장르적 성격은 많이 차이가 나지만 주인공 캐릭터가 여자이고, 풋풋한 사랑 감정이 마음 속에 피어나고 있는 공통점이 있죠.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의 심리에 초점을 맞춰 주제가를 만들다 보니 그런 기분이 들었나 봅니다. 헌데 지금은 2009년이죠. ‘사랑은 정말!?’ 주제가를 만들었던 것은 1997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시간이 타임머신을 탄 듯 거꾸로 흘러가더군요. 그리고 너무나 또렷하게 예전 시간에 도착한 자신을 보게 됐습니다.
Ⅱ.
1997년은 제가 투니버스에서 더빙을 막 시작한 시기입니다. 그 이전에도 PD였지만 스튜디오에서 제작물을 만들었지 애니메이션 더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름 방송 경력이 있는 PD지만 더빙은 초짜였던 셈이죠. 당연히 주제가를 만드는 일도 이때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정말!?’은 이창희 음악감독과 만든 두 번째 창작 주제가입니다. 참고로 첫 번째는 ‘환상게임’ 주제가였어요. 그 무렵의 주제가는 여러 면에서 지금보다 전문성이 떨어져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일단 주제가를 만드는 비용에 투자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실력 있는 전문 음악인이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원인은 제작진 자체가 주제가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투자가 적은 것이었죠. 물론 예전 주제가라고 해서 모두 기준 이하는 아닙니다. 이전의 지상파 방송 주제가나 투니버스 주제가 중에서는 명곡 반열에 오를 작품들이 존재하죠. 하지만 평균적인 면에서 보면 기준 이하의 주제가들이 많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애니메이션 팬들이 매우 안타까워했었죠.
Ⅲ.
제가 처음 가사 작업을 한 것은 ‘무책임함장 테일러’ TV스페셜을 녹음하면서였습니다. 그 작품에 오프닝으로 사용된 노래가 극중 클라이맥스에 캐릭터들의 합창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 노래의 가사작업을 한 것이 제 첫 번째 작사 일이었습니다. 담당PD가 작품주제가 가사를 매만지는 일은 당시엔 흔했습니다. 거의 당연 하다시피 했죠. 전문 작사가를 섭외할 만한 비용도 책정하지 않았고, 솔직히 아는 작사가도 없었던 시절이에요. 이러다 보니 당시 상당수의 주제가 가사들이 담당PD의 개인능력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악적 감각이 좀 떨어지거나, 아예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PD가 가사를 어레인지할 경우 가사 내용은 번역투를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말 가사 자체가 멜로디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곤 했죠. 이런 상태의 가사를 억지로 노래로 만드니 멜로디도 죽고, 리듬도 엉키고, 내용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결과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테일러 주제가를 만들 당시에도 번역되어온 가사 내용은 그대로 노래를 부르기에 매우 부족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밤새 가사를 고치다 보니 동이 틀 무렵에는 아예 다른 가사를 만들어놓았죠. 그리고 그 노래가 방송에 나간 뒤 많은 분들의 호응이 있었고, 이를 시발점으로 지금은 전문 작사가 반열에 오른 저의 작사생활이 펼쳐지게 됩니다.
Ⅳ.
이렇게 97년 초부터 초짜 더빙연출과 작사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바로 그 해 ‘환상게임’을 통해 이창희 음악감독과 만나게 됩니다. 환상게임 때 정말 열악한 제작비와 녹음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기타세션까지 써가며 수준 높은 곡을 만들어낸 이창희 음악감독은 그때의 강한 인상으로 시작해 이젠 10년이 넘는 음악동반자가 되어있죠. 그리고 두 번째로 만든 창작 주제가가 바로 ‘사랑은 정말!?’입니다. 음악감독이 반주를 만들어오면 투니버스 녹음실에서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투니버스 녹음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디오 채널이 달랑 8개였어요. 해서 반주가 스테레오라 2채널을 쓰고, 보컬이 1채널, 남은 5개에 코러스 등을 녹음했습니다. 풀버전 개념도 없이 1분 30초짜리 주제가를 그렇게 만들었죠. 어쩔 땐 8개 채널 중 2개를 믹싱 채널로 쓰기도 했어요. 그럴 땐 코러스에 달랑 3채널이 남게 되죠. 요즘은 어지간하면 코러스에 8개 채널을 할당하고, 전체적으로는 44채널을 쓰고 있으니 당시는 참 거의 원시적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아요. 더더욱 원시적인 것은 ‘환상게임’이나 ‘사랑은 정말!?’ 작업 때 가사를 미리 만들어놓고 곡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만든 가사의 운율은 원래 있는 일본 주제가에 맞춰놨죠. 왜? 미리 하다 보니 달리 기준 삼을게 없어서 그랬던 거죠. 이렇게 새로 만들 노래와 아무 관계 없이 나온 가사를 가지고도 기억에 남을 훌륭한 멜로디를 만들어낸 이창희 음악감독에게 다시 머리가 숙여지더군요. 물론 이후 이런 상태로는 너무 힘들다고 선 작곡, 후 작사 작업으로 전환하게 만든 것도 이창희 음악감독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서 원시적인 작업을 탈피하기 시작했던 거죠. 99년 무렵입니다.
Ⅴ.
오래 전 일이지만 지금도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의 타임머신 성능이 훌륭해서일까요? 그보다는 당시의 뜨거운 열정 때문이라 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지만 뭔가 잘하고자 하는, 정말 잘하고 싶은 열정은 어쩌면 지금껏 쌓아온 노하우를 넘을만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심해야 할 것이 나태함입니다. 노하우가 쌓일수록 조심해야 할 것은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하는 성급함이죠. 이번 캐릭캐릭체인지 두근두근 주제가 작업은 오랜만의 작업이라 이전보다 뭔가 더 열정이 들어가면서 불현듯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줬습니다. 갑자기 힘이 불끈 솟으며 앞으로의 작업이 무척 기대가 되는 지금입니다. 애독자분 들도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면서 내년을 가득 불태울 열정의 씨앗을 마련하시길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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